250113 은혜 갚은 천재 고양이
자다가 지직거리는 이상한 소음을 들었다. 잠결에 아파트 방송이 문제가 생겼나보다 하고 다시 잠에 들었는데 분명 아직 이른 시간이건만 보리가 계속 울어댔다. 뭔지도 모르고 그만 울라고 짜증을 냈는데 계속해서 들리는 치직 거리는 소리, 그리고 코를 찌르는 듯한 화학 냄새. 화학 냄..새......? 라고 느낀순간 벌떡 일어나 확인했더니 침대 헤드 옆쪽의 간이 의자 밑에 위치한 콘센트에서 나는 소리였다. 상황 파악할 새도 없이 눈 앞에 보이는 불꽃에 나도 모르게 콘센트의 전원버튼을 전부 눌러 껐다. 전체 전원을 끄고서야 소음도 불꽃도 멈췄다.
와, 나 진짜 죽을뻔했구나. 하늘이 아직 내 할 일을 다 못했다고 살려주신 모양이다.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깨어보니 침대 옆쪽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얼마 전부터 너무 건조해서 창고에 넣어둔 가습기를 꺼내 썼는데 그게 원인으로 보인다. 소름돋는 것은 내가 금요일 밤에 나이트 모드로 틀어 놓고 끄지 않은채로 주말 1박 2일동안 집을 비웠다. 그리고 어제 자기 전 풀 파워로 가동해두고 잠들었는데 문제의 사건이 있고나서 확인해보니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만약 금요일 밤에도 풀파워로 해두었더라면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애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출근준비를 하지 않으면 늦는다는 것을 아는데 손이 떨리고 심장이 벌렁거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통화연결음이 울리자 그제서야 엄마한테 말하면 걱정하실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부재중통화 기록이 남아서 전화 통화를 할수 밖에 없었다. 상황을 말씀드리니 엄마가 갑자기 할아버지가 도우셨나보다, 천만 다행이다, 라고 하셔서 갑자기 왠 할아버지? - 할아버지는 30년 전에 돌아가셨다. - 했는데 알고보니 오늘이 할아버지 제사라고.
나는 과학을 믿는 사람으로서 신도 믿지 않고 종교도 없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할아버지가 나를 도와주셨다고밖에 설명을 못하겠다. 만약 누전이 조금 더 늦게 일어났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까? 출근한 사이 무슨일이 났다면 또다른 최악의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콘센트를 만든 회사 측에도 너무 감사했다. 어찌됐건 누전 설계가 잘 되어있어서 바로 불이 붙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살때 가격도 얼마 안했던것 같은데 품질이 참으로 좋았네... 어쨌든 앞으로 콘센트는 비싸고 좋은 제일 안전한 걸로 써야겠다.
그리고 우리 보리. 늠름하고 착한 내 첫째 보리. 그러고보니 보리는 그동안에도 활약을 하긴 했다. 특히 이상하리만치 울어서 잠에서 깨보면 해가 중천에 떠있다던가 하는 일이 있곤 했는데 오늘도 얘가 울지 않았으면 내가 이상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을까. 사실 정신차리고 출근준비하면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우리 보리 천재 아닐까. 동물농장에 제보하면 은혜갚은 고양이라는 타이틀로 뜨겠지? 어쨌든 출근에 늦을 것 같았지만 간식을 대령해 드렸다.
참으로 감사한 하루이다. 어쩌면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살아가야겠다.